"바쁘다 바빠." 를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사는 우리지만, 가끔 혼자만의 생각을 하고 좋은 책을 한 권 읽고 싶을 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 한권이 필요하다.
하루 10분 동안 이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면 어찌 뿌듯하지 않겠는가. 이런 의도로 <한국문학 대표 단편소설> 중에서 길지 않지만 내용은 가볍지 않은, 한 번쯤은 생각하며 왜 그럴까? 할 수 있는 책들을 엄선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봉별기>는 금홍과의 만남과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이상이 1936년 『여성』에 발표한 작품으로 이상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어렵게 느껴지는 이상의 소설 가운데 쉽게 읽혀지는 작품으로, 잠재의식을 표출시킨 부분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지문과 대화도 보기 쉽게 구별되어 있다.
그는 실제로 폐병을 앓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백천 온천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기생 연심이를 알게 되어 애정을 갖는데, 금홍이의 본명이 연심이라고 한다
이상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날개>와 함께 기생 연심과의 생활에서 얻어진 작품이긴 하지만, <날개>가 ‘나’와 ‘아내’의 자의식의 갈등을 그린 것이라면 이 <봉별기>는 작품 속의 금홍과의 만나고 헤어짐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구에 의하면 금홍과 3년간의 결혼생활이 이상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소설속에서 금홍과 이상이 서로 노래 한마디씩하며 헤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그 노래가 궁금했서 인터넷으로 찾아보았었다. 독자들도 궁금해하지 않을까하여 링크해 놓았으니 한 번쯤 찾아가 보시길 바란다.
소설은 이별주를 마신 금홍이 내가(작품속 이상)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부르는 것으로 끝난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 질러 버려라 운운”하는 가사다. 속이는 사람도 속는 사람도 꿈을 꾸는 듯이 일생동안만 산다. 어차피 우리는 세상의 뜨내기어라,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만남과 이별을 간단명료하게 끝낼 수 있었는가......
사랑 참 모를 일이다.
2017년. 4월. 어느 봄날.
李箱, 본명 : 김해경(金海卿)
출생 ~ 사망
1910년 9월 23일~1937년 4월 17일
【20세기 한국문학사에 내장된 최고의 형이상학적 스캔들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1930년대에 있었던 20년대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반발한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였다.
그는 건축가로 일하다가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겉으로는 서울 중인 계층 출신으로 총독부 기사였던 평범한 사람이지만, 20세부터 죽을 때까지 폐병으로 인한 각혈과 지속적인 자살충동 등 평생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한국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시와 소설을 창작한 바탕에는 이런 공포가 늘 그의 삶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10년에 태어나 1912년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의 집에 장손으로 입양되었고, 영민하여 학업 성적은 우수하였고,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질이 있어 학창시절, 직장시절 내내 그림에 꿈을 품고 열중하였다. 또한 유창한 일본어 실력이 있었고, 예술적 이상향으로 동경(도쿄)을 꼽았다고 한다.
스스로를 선각자이며, 천재, 모더니즘의 기수이자 전위예술의 선구자라고 자처했는데, 식민지 시대임에도 민족적인 자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범세계적이고 현대적인 문명에 심취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한국 고유의 색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유럽이나 일본 문학계에 유행하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실제 생활은 나태하고 난잡, 무기력했다고 전해지며,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1933년,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금홍을 만났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금홍을 잊지 못하여 '제비다방'을 마련해 그녀를 마담자리에 앉혔다. 그는 금홍과의 만남 이후에도 여러 여급들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들과의 관계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어 작품들을 집필하였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며 <봉별기> ,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었다.
그러던 그는 여류문인이자 친구 구본웅의 이복 동생인 변동림 (이상이 죽은 뒤 화가 김환기와 결혼, 김향인으로 개명 )과 결혼을 하였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가족과 아내를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고,<봉별기>를「여성」에 발표하였다. 그의 마지막 여자인 변동림은 <동해> , <단발>, <행복>, <종생기>의 <선>, <실화>의 <연>등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여자와 술과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존경하던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