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 화가, 시인, 소설가, 희곡작가, 시대적 여권 주창의 선도자로서의 페미니스트, 분명한 민족의식의 소유자인 독립운동가, 언론인, 근대 신여성의 효시...... 나혜석을 말할 때 나오는 표현들이다. 이렇게 다재다능했던 그녀를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바람나서 이혼한 여류화가쯤으로 기억한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다양한 재능을 지닌 채 사라져야 했던 그녀를 남녀평등의 시대를 지향하고 있는 요즘의 우리들은 다른 평가를 해야하지 않을까.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 화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음에도 나혜석의 작품은 1932년 작업실 화재로 대부분 소실된 뒤 10여 점만 남아 있다. 이런 희귀성으로 경매시장에 나온 적이 없어 가격도 추산하기 힘들다. 조선미술대전 출품작조차도 현존하는 작품이 없이 도록에 실린 흑백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나혜석 작품집>을 만들려고 마음먹으면서 어느 장르를 먼저 시작해야할까 고민하는 중에 그녀의 감성으로 내면의 강함과 아름다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시대정신과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아름다운 그림과 시가 가슴으로 다가왔다.
'화가 나혜석' 편을 통해서 서양화가로서 파리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다양한 화풍을 보여주는 그녀의 그림을 단편적으로나마 소개해보고자 한다.
'시인 나혜석' 편에서는 1919년 3·1운동과 민족적 분노 그리고 피지배 민족으로서의 가혹한 철창 경험,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생의 무상감과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철학적인 물음이 담겨져 있는 <냇물>과 <사 [砂]>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의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는 <인형의 집>은 여성해방의 혁명적 자유사상을 담은 서양의 유명한 희곡인 입센의 '인형의 집'에 나오는 여주인공 '노라'의 행동적 여성해방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나혜석, 그녀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2017년. 5월. 아카시아향기 속에서.
나혜석 – 1896 ~ 1949
경기도 수원에서 나부잣집이라 불리는 집안에 5남매 중 둘째 딸로 출생하였다. 학교 성적은 늘 우수했고 특히 그림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일본 도쿄에 유학 중이던 경석오빠의 설득에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하여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서양미술의 유화 전공을 택하였다. 당시 서양화를 전공하던 남성도 두세 명에 불과했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며 조건을 내걸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해주시오.
남녀차별이 당연했던 그 시대에 이런 조건은 파격 그 자체였다. 또한 신혼여행이란 개념도 없던 시대에 첫사랑 최승구의 무덤을 신혼 여행지로 택하며 김우영에게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927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아이들은 남겨두고 세계일주 여행을 출발했다. 미술의 도시 파리에서만 8개월간 머물며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변화하는 새로운 미술 경향을 직접 접했다. 야수파 계열의 진보적인 화가가 지도하던 미술 연구소에 다니며 자신의 회화 예술에 변화를 시도했다.
1931년 유럽에 머물 때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김우영과 이혼하게 된다.
1934년 이혼한 김우영 앞으로 띄운 공개서인 '이혼 고백장'을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도 제기하였었다. 이는 한국 근대 여성사에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신문이나 잡지들은 나혜석의 세상의 불공평에 대한 저항과 고독한 생활 변모를 끊임없이 기사화하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나혜석은 그림으로도, 글로도 사람에게 외면당하며 몸과 마음이 지치고 병들어 갔다. 그녀의 눈부신 재능은 이혼녀라는 굴레에 가려 빛이 바랬다.
1949년 53세의 나이로 서울 원효로의 자제원 무연고자 병실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